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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 6

노을 6 - 김용기 노을 머무는 바로 아래 등 둘 나란히 앉아 있었다 반대쪽이 궁금했으나 긴 시간 돌아보지 않는 저들 노을이 우려낸 감동이 수직으로 내려와 이 쪽 가슴에서 저 쪽 가슴으로 건너다니고 있음이 분명 어두워질수록 저들 등은 더 좁혀질 테고 멋쩍어진 궁금증 하늘에 달라붙었던 소리들이 반짝거리기 시작했을 때 태반은 감동 구 할은 저들의 것 나머지는 이명 또 반은 이명의 메아리, 밤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내 소리에 부끄러웠는데 가슴이 노을을 붙잡고 있어서 깜짝 놀랐다.

카테고리 없음 2022.08.29

촛불을 켜다

촛불을 켜다 - 김용기 타들어 갔고 심지의 꼬부라진 머리를 보았다 가운데 선 심지가 탄 머리를 숙이지 않았더라면 촛불은 흔들리지 않았을 테고 타다가 주저앉을 지라도 제 자리 떠나지 않는 촛 몸의 숭고함에 그 송구함이랴 촛불이 흔들리는 이유가 되었다 타닥타닥 어떻게 장작불을 이기랴만 타면서 날아가고 재로 흩어지고 당할 수 없는 불춤의 연기였으나 모일 줄 모르는 이기심은 변함없었다 제 몸을 때웠고 아끼지 않는 지고지순에 탄 심지가 고개를 숙였다 한 몸, 장작과 달랐다 녹아 흘러내림은 두려웠으나 내 귀로 들어온 촛불 꺼지지 않는 곳 자리를 잡았다.

카테고리 없음 2022.08.29

담쟁이

담쟁이 - 김용기 정체성 운운은 한가한 사족 매달린 까닭은 죽지 않기 위해서였다 느림이 문제 된 적은 없었다 잡은 뒤 어딘지도 모르고 무작정 기어올랐지만 힘을 더 준 이유 살려면 어쩔 수 없었다 구름의 빈틈을 찾은 햇빛이 연한 이파리에 표독스럽게 앉았을 때 그저 그런 풀잎쯤으로 여겼을 테지만 발톱 숨기는 것쯤 두려움 축에 끼지도 못했다 유산(流産)이 잦던 한 여인이 담쟁이넝쿨을 끓여먹은 후 순산 미신 같은 얘기 ‘쉿, 소문내지 마 담쟁이에겐 죽음이야’ 담쟁이의 움켜쥐는 고집에 거룩한 사명감이 숨어 있었다.

카테고리 없음 2022.08.08

신, 우산동 192번지

신, 우산동 192번지 - 김용기 멀어지는 기차 소리가 익숙해질 무렵 고요가 찾아왔지만 증오했던 가난은 떠나지 않았다 역을 눈앞에 두고 속도를 늦추었고 철퍼덕거리는 소리가 새벽잠을 파고들었을 때 기차는 어린 시절 적이었다 좁은 시유지에 우격다짐으로 급히 지은 거처였으므로 빨간 벽돌집 개축은 언감생심 반듯한 길 하나 없었으나 사립문은 별 어려움 없이 드나들었고 아버지의 변화 없는 긴 삶도 거기서 마쳤다 희미한 밤기차에는 도란거리는 음성이 있었고 정직한 시간 때문에 새벽기도는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밀어낸 공동묘지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섰고 그 그늘 속 음습함이 허락도 없이 지붕을 덮기 시작하면서 새 적이 되었다 기차가 새 길로 떠난 후 고요가 삶을 바꾸어 줄 것으로 알았는데 허사였다 따지고 보면 고요는 원하는..

카테고리 없음 2022.08.06

여름 휴가

여름 휴가 - 김용기 낙숫물 소리 세다가 든 잠 속에 툇마루 끝에 서서 마당에 오줌 싸던 소리를 골라내는 낮잠은 시원했다 반쯤 읽힌 책이 옆구리에 함께 누워 있었고 비구름에 가로막힌 파란 하늘은 화롯불 불씨 휘젓기듯 먹구름 흰구름 섞여 빠르게 지나갈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움찔 바르르 떠는 오수(午睡)의 꿈에 '이노움' 할아버지의 꾸지람을 만났으리라 여름휴가 한 토막이 땀에 젖었다 동화 속 얘기 같은 어린 시절 기억은 소나기 탓이었다.

카테고리 없음 2022.08.05

착각

착각 - 김용기 가만히 있어도 오리는 그냥 물에 떠 있는 줄 알았다 그게 아닌데 버려진 필름이 80% 수 없는 NG를 맞아야 겨우 TV 안에 들어갈 수 있는데 켜면 단박에 누를 때마다 자동으로 맘에 드는 연기가 나오는 줄 안다 그게 아닌데 목소리 커서 이긴 줄 알았을 테지만 골다공증 든 뼈처럼 허약 허세 든 말 모두 알고 있었다 나이를 먹으나 젊으나 제 기준으로 보고 듣고 판단하는 걸 말릴 재간은 없다 머리 좋은 걸 어쩌랴 입술은 우준했으면 좋겠는데.

카테고리 없음 2022.07.25

에로티시즘

에로티시즘 - 김용기 짝을 세워놓고 노골적으로 사부작사부작 더운 여름은 벼이삭이 수분하는 시기다 해 지나 생사를 모르는 사이라면 근친상간은 아닐 듯 별로 얻을 것 없다는 걸 알고 벌은 오지 않았다 남이 잠자리를 도와주는 격 과수원 얘기다 낮에 벌과 사랑을 나누는 신세대 찾아 나선 적 없고 어느 벌도 박대하지 않는 우유부단함 스와핑의 오해를 받는 이유다 맛이 변하지 않는 것은 지금까지 오로지 한 자세만 집착하는 결과일까 벼이삭도 과수원 이파리도 바르르 떨 때 그때가 그 때다.

카테고리 없음 2022.07.23

각도에 따라

각도에 따라 - 김용기 법 없이도 살 남편이라고 띄워주었다면 술 한잔 얻어 마신 과거 있음이 분명 하루만 살아보라는, 시큰둥한 아내 초원에서 살고 싶다는 고상한 말 끝 잘 생각해 보라고 초원은 소똥 밭이라고 굳이 그 시간 사실을 말해야 했을까 보는 각도에 따라 선이 면이 되고 면은 선이 되고 더 가까이 들여다보니 접시물도 바다였으며 배우의 얼굴은 멍게였고.

카테고리 없음 2022.05.01

늘다

검정색 비닐봉지 하나 발광을 하더라도 그냥 놔 둘 일이다 철없이 억센 봄바람 따라다니며 노는 걸 막을 수 없는데 내버려 두면 곧 대추나무 가시에 찔려 꼼짝 못 할 거다 이런 날 방에 있으면 좋으련만 못 간 흑두루미 떼 구경 나간 철없는 며느리 걱정 따라나선 강아지는 돌아오려나 별게 다 걱정 우수 지났어도 제법 찬 오늘 같은 날 아들 앞세우는 며느리가 잔망스러워 조바심 느는 나이 때 되면 다 제자리 찾아 평탄할 텐데 방문을 잠그셨다 요즘 컬러 TV에 지나간 흑백이 잦게 나오면 리모컨을 찾게 마련 눈물이 늘고 욕심도 늘고 걱정도 늘고 고집이 늘고 서운함이 늘고 잔소리가 늘고 홀어머니 늘어난 것들이다 아내의 늘어날 것들을 안다 아들 편인 시간은 너무 길고 뒤란 대추나무에 톱 들이댈 수는 없는 일 기다리는 지혜..

카테고리 없음 2022.03.05